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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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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론

    나와 상관이 없이 정체가 찾아올 때가 있다. 주어진 사명을 오늘도 감당하고 있다. 하지만, 어제나 오늘이나 달라진 것이 없다. 믿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있는데, 내 삶에는 변화가 없는 것 같다. 기도를 계속하고 있지만, 응답은 오지 않는다. 기도를 계속하는 것에 대한 의심이 찾아온다. 몸은 늙어가고, 마음은 지친다.

     

    희망은 무색해지고, 신앙생활은 매너리즘에 빠진다. “하나님은 정말 나를 기억하실까?”

     

    사가랴와 엘리사벳. 한 부부가 소개되고 있다. 그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 그들은 제사장 집안이었고 신앙의 명문 가문이었다. 그들은 계명과 규례대로 흠 없이 살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에게 아이가 없단다. 기도하고 소망하고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이 불임을 증거할 때, 그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자신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닌지, 문제의 원인을 찾기 위해, 해결 방안을 강구하려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헤매였을까? 서로를 위로했다가, 서로를 원망하면서 수많은 밤을 어떻게 지새웠을까? 늙음 그 앞에서 믿음의 창문을 여전히 열고 기다릴 수 있었을까?

      

    그러던  그 어느 날. 하나님의 천사가 늙은 사가랴를 찾아왔다. 그 날은 늙은 제사장이 성전을 섬기는 날이었다. 이것이 바로 세례 요한의 출생 배경이다.

     

    본론

    1. 기도는 잊혀지지 않는다 (5-13절)

    누가는 본문을 시작하며 역사적 배경을 제공한다. “유대 왕 헤롯 때에”란 말은 단순한 시대표기가 아니다. 어둠의 시대였다. 정치적 억압과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가난 속에서 그들이 그토록 간절히 기다리던 메시아는 오지 않았다. 사가랴와 엘리사벳, 늙은 부부의 상황, 이보다 더 이스라엘을 잘 설명해 주는 모습이 있을까. 소망의 창문을 계속 열고 있기 쉽지 않은 시대. 바로 그 시대, 그 땅에, 세워진 하나님의 성전에 하나님의 천사가 찾아왔다.

     

    사가랴 그는 아비야 반열에 속한  제사장이었다. 그는 엘리사벳과 함께 하나님의 앞에서 의롭게 살았다. 그런데 그 ‘의로움’이 바람 앞에 촛불이다. 그에게는 그 의로움을 이어갈 아이가 없었다.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 자녀 없음은 하나님의 저주로 간주되곤 했다. 얼마나 속이 터질까.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라는 증거와 자녀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저주가 아닌가하는 증거가 함께 하는 이런 입장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제사장 사가랴는 정한 차례를 따라 성전에서 분향을 드린다. 홀로 분향하는 직무는 그의 일생에서 다시 없는 영광스러운 순간이었다. 많은 제사장 중, 제비를 뽑아 정해지는 이 분향은 하나님 앞에서 중보자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었다.

     

    사가랴, 자신에게 더없는 영예의 날, 그 아침 제사장의 의복을 입고 성전으로 올라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자녀(신앙의 계승자)의 빈자리가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 마음을 뒤로하고 하나님의 전에 올라 분향을 드리는 사가랴, 향단 우편에 주의 사자가 나타난다.

     

    천사는 사가랴의 이름을 부른다. 그리고 말한다. “무서워하지 말라, 네 기도가 들린지라.” 네 기도, 수많은 기도의 제목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를 드렸지만,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기도는 어쩌면 하나였을 것이다.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하신다.

     

    그 기도는 단지 개인의 소망이 아니었다. 그 기도의 응답은 한 사람의 인생을 넘어, 한 민족의 역사를 열어갈 출발이었다. 하나님은 사가랴의 ‘작은 기도’를 통해 ‘큰 계획’을 펼치신다. 엘리사벳이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게 될 것이다. 그는 메시야의 오실 길을 예비할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 응답된다. 모든 기도를 받으시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계획)을 이루어 가신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구속사 안에 어떻게 쓰일지, 우리는 모른다. 하나님은 틀림없이 응답하신다.

     

    2. 인간의 한계, 그 불가능이 바로 하나님의 응답의 무대다 (14-17절)

    하나님의 역사는 많은 경우 ‘인간의 불가능’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은 인간의 무너짐을 두려워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 무너짐 위에 당신의 뜻을 세우신다. 우리는 한계 앞에서 멈출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은 그 자리를 무대로 삼으신다.

     

    사가랴와 엘리사벳. 그들은 의로웠으나, 자녀가 없었다. 계속 기도했지만, 계속 응답은 지연되었다. 기다렸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그리고 결국, 한계라는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의 천사가 찾아왔다.

     

    믿음이란, 가능성이 아니라 말씀 위에 서는 것이다. 합리적 조건이 아니라 약속 위에 사는 것이다. 인간의 조건은 반드시 한계를 만난다. 하나님의 역사는 한계가 없다.

     

    사가랴의 나이, 응답의 걸림돌이 아니다. 엘리사벳의 태, 하나님의 계획을 가로막을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이 임하면, 닫힌 문은 열린다. 끝난 줄 알았던 시간이, 다시 시작된다.

     

    요한은 그렇게 왔다. 인간의 끝을 시작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왔다. 죽음의 문을 열고, 사명을 위해 왔다. 그는 그냥 태어난 아이가 아니다. 그는 신실하신 하나님, 한계가 없으신 하나님의 응답이다.

     

    그가 바로 하나님의 메시지였다. “나의 존재가 바로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는 확실한 증거다. 인간의 불가능을 통해 일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

     

    요한은 포도주를 마시지 않을 것이다. 그는 술이 아닌 성령으로 충만할 것이다. 그는 세상의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채워진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의 삶은 하나님의 계획이 몸으로 나타난 위대한 이야기의 맛보기다. 

     

    그는 엘리야의 심령으로 왔다. 백성을 돌이키고, 마음을 회복시키고, 주께서 오실 길을 곧게 하였다. 회개 없는 부흥은 없다. 돌이킴 없는 준비는 없다. 요한은 길을 예비하고 그리스도 그 길이 되신다.

     

    신앙은 두물머리다. 나의 한계의 강과 하나님의 역사의 강이 만나는 지점이다.

    나도 아주 조금 안다. 당신이 얼마나 간절히 구하며 온 힘을 다해 살아 왔는지 조금은 안다. 착하고 순진한 당신이 하나님께서 주실 반전, 역전, 그 은혜의 때를 기다리다가 기다리다가,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되었다는 것을 아주 조금 안다. 

     

    그런데, 잠깐 입장 바꿔서 생각해 보자. 입장 바꿀만큼의 수준이 안되니깐, 이렇게 생각해 보자. 러닝타임 3시간짜리 길고 긴 애니메이션 영화를, 당신이 너무나도 사랑하는 당신를 꼭 닮은 아이와 함께 보러갔다. 당신의 직업은 공교롭게도 영상심의위원회 소속의 심의위원이다. 당신은 며칠 전에 이 애니메이션을 눈이 빠지고 귀가 빠지도록 보고 또 보면서 영상 상영 허가에 오케이를 한 장본인이다. 시작과 과정과 끝을 빠싹하게 알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가 얼마나 재미없고 지루하고 유치한지 잘 안다. 그런데, 아이와 함께 영화를 보러 온 것이다. 아이는 3시간 내내 계속해서 지루하다, 재미없다, 기대이하다, 이럴 수는 없다, 답답하다, 왜 이렇게 만든거냐, 내가 만들어도 이것보다는 낫겠다를 남발하면서 지꺼는 광고시간에 거의 다 먹었고, 당신의 오렌지 주스와 팝콘까지 싹 비우면서 징징거렸다. 그러면 중간에 나가면 되지라고 생각하겠지. 아이가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앉아 있어서 꼼짝을 할 수 없었단다. 자 이제 생각해 보자. 당신과 당신의 아이 둘 중 누가 더 이놈의 ㅣ영화가 제발 빨리 끝나기를 간절히 기다렸을까?   


    내가 멈추기를, 내가 내려놓기를 하나님도 기다리셨다. 눈이 빠지도록. 하나님은 강한 자를 찾지 않으신다. 오히려 소망이 없는 자, 무너진 자, 실패한 자, 그들을 통해 당신의 은혜를 채우신다.

     

    그래서 복음은 우리에게 좋은 소식이다. 요한의 출생은 하나의 선언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불가능’이라는 무대에서 펼쳐진다. 사람이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신다.


    “당신의 한계는 어디인가?” 거기로부터 성령의 바람이 불어온다. 하나님의 은혜의 강이 흐른다.

    인간의 한계, 그 불가능이 바로 하나님의 응답의 무대다.

     

    3. 침묵 속에서 믿음이 자란다 (18-25절)

    우리의 말이 우리의 믿음을 방해할 때가 있다. 하나님은 때로 침묵 속에서 믿음을 빚으신다. 말이 멈출 때, 비로소 진짜 믿음이 자라기 시작한다. 믿음은 논증의 결과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를 때, 믿음이 나고 자란다.

     

    사가랴는 제사장이었다. 그는 율법을 알고, 말씀을 낭송하며, 기도를 인도하는 자였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을 때, 믿음으로 반응할 수 없었다. 천사는 말한다. “나는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가브리엘이라.”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자다,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파송된 증언자였다.

     

    그의 말을 듣고도 사가랴는 이렇게 묻는다.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우리 모두가 하는 질문이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어떤 증거로 확신할 수 있습니까?’, ‘지금까지 이 오랜 시간동안 아무런 일도 없었는데, 하나님이 역사하신다는 것을 어떻게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희망 고문에 시달려 본 사람은 안다.

     

    믿음은 증거가 모두 제시된 후에 생기는 논리적 결과물이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음을 나타내는 증거다. 말씀이 임하여 말씀이 삶의 기준이 되고, 말씀이 어떤 것도 흔들 수 없는 확신이 되는 순간, 믿음은 현실보다 더 실체가 된다.

     

    하나님은 그의 믿음 없음을 꾸짖지 않으셨다. 그의 입을 닫으심으로 그의 귀를 여셨다. 말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믿음을 위한 공간을 마련하신 것이다. 침묵은 형벌이 아니라 기회다. 말이 멈춘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온다.

     

    우리는 너무 많이 설명한다. 쉼없이 자신과 타인을 납득시키려고 말을 한다. 그런다고 신뢰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시끄러운 말들 위에 침묵의 거룩함을 덧입히신다.

     

    사가랴는 이제 단지 ‘보고 듣는 자’가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현실이 되어가는 과정을 침묵 가운데 바라보는 자가 된다. 믿음은 듣는 자리에서 자란다. 믿음이 뿌리가 깊이 내려가도록 하나님은 우리를 침묵의 자리로 초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사가랴로 침묵의 자리에 머물러 있게 하시고, 그의 아내 엘리사벳을 다섯 달 동안 숨기신다. 그 숨어 있음은 수치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적이 형성되는 은밀한 시간이었다.

     

    모든 눈길과 평가로부터 벗어나 오직 하나님과 함께 머무는 시간이었다. “주께서 나를 돌보시는 날에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수십 년간의 눈물과 침묵에 대한 응답이다.

     

    그녀의 삶을 지배하던 부끄러움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무대가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침묵 속에서 일하신다.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때, 그 곳에서, 그분께서 모든 것을 준비하신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드는 것은 ‘능력’이라는 화려한 손이 아니라 ‘인내’라는 기도의 손이다.

     

    침묵, 말하지 못함, 그리고 숨겨짐, 드러나지 못함은 인내라는 나무가 가장 좋아하는 토양이다.

    신앙의 깊이는 말을 얼마나 잘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침묵을 얼마나 깊이 신뢰할 수 있느냐로 결정된다.

     

    우리는 묻는다.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 나는 가장 깊은 곳에서 일하고 있다.”

     

    침묵은 불임의 계절의 상징이 아니다. 그것은 불임과 불신을 걷어내고 믿음의 열매를 거두는 하나님의 작업장이다.
    거기서 믿음은 말이 아닌 실체가 된다.

     

    결론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신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은 그 자리에서. 말씀이 멈춘 것처럼 보이는 그 시간 속에서. 그분은 멈추지 않으신다. 기도는 사라지지 않는다. 기도는 하늘에 쌓인다. 침묵은 외면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작업실이다.

     

    내가 멈춘 자리에서, 하나님은 일하기 시작하신다. 내가 주저앉은 그 자리에, 은혜가 흘러들어온다. 내가 한계를 만나 포기할 수밖에 없을 때, 하나님은 준비하고 계셨다.

     

    말을 줄여야 들린다. 움직임을 멈춰야 보인다. 신앙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 빠름보다, 기다림이 깊다. 하나님은 강한 자를 찾지 않으신다. 기도를 멈추지 않는 자를 찾으신다. 눈물로 버틴 자. 침묵으로 견딘 자. 말없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은 일하신다. 그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요한의 출생은 기적이 아니다. 그것은 복음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응답이다.
    하나님은 불가능 위에 역사하신다. 늙음을 기다리신 하나님을 만나보라.

    끝난 줄 알았던 인생에, 하나님은 “지금이 시작이다”라고 말씀하신다. 한계를 부정하지 마라. 그 한계가 하나님의 무대의 입구다.
    침묵을 두려워하지 마라. 그 침묵은 믿음의 뿌리가 자라는 흙이다.

     

    기억하라.
    당신이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하신다.

    그분은 반드시 응답하신다.
    조용히.
    깊이.
    그리고 정확히.

    (송병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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