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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론: 혼란의 시대, 무엇이 확실한가

    사람들은 알고 싶어 한다. 확실한 것을. 아무리 의심해도 흔들리지 않는 것을. 하지만, 도대체 그런 확실한 것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지금 우리는 모호함 속에 산다. 누가 말하든, 무엇을 보든, 그 진실 여부를 끊임없이 검토해야 한다. 알고리즘은 원하는 대로 보여주고, 감정은 사실을 덮는다. 말은 넘쳐나지만, 신뢰하기 어렵다.

     

    솔직히 말해보자. 우리의 신앙도 그렇지 않은가. 누군가가 “예수는 당신을 위해 죽었다”고 말하면, 습관적으로 아멘을 외친다.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죽었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느냐고 한번 더 물어보면 표정이 안 좋다. 누가라는 사람이 살았던 시대도 이런 점에서 우리의 시대도 별반 다르지 않다. 바로 그런 불확실의 시대를 향해,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혼란의 나날을 살았던 한 사람에게 누가복음을 쓰고 있다.

     

    데오빌로. 그의 이름이 가진 뜻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다. 잘은 모르지만, 그 이름이 불릴 때마다 본인은 얼마나 거시기 했을까. 교회에서 불릴 때의 그 이상한 느낌, 세상 속에서 불릴 때 따라오는 오묘한 눈빛들, 무엇보다 그의 내면에서 울려오는 메아리들. 어지러운 세상, 흔들리는 그를 향해 누가 그 무엇도 흔들 수 없는 한 가지 사실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는 담담하게, 담백하게, 그러나 단호하게 말하고 있다. "당신이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들었던 그것이, 바로 사실이다."

     

    이제 우리,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데오빌로의 자리에 앉아 누가가 들려주는 사실, 2000여 년, 숱한 세월 동안 끊임없는 공격을 받으면서 한번더 흔들리지 않았던 그 이야기를 들으려 한다. “복음은 신화가 아니다. 역사적 사건이다.”

     

    본론

    1. 복음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구약의 예언을 따라 이루어진 사실이다 (1-2절)

    누가는 시작부터 선을 긋는다.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사실’이라는 단어는 타협을 모른다. 이것은 누가가 전하고자 하는 모든 말의 토대다. 복음은 상상에서 나온 소설이 아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환상도 아니다. 땅 위에서, 피와 땀과 시간 속에서 생생하게 이루어진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붓을 들었다”고 그는 말한다. 흥미롭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내력을 쓰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이루어진 그 사실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누가는 자신이 이 이루어진 사실에 대해서 다시 써야겠다고 판단했다. 왜일까? 기록들은 있었지만, 질서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료는 있었지만, 정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는 '목격자들'과 '말씀의 일꾼들'이 전해 준 것을 바탕으로 다시 기록한다. 그가 직접 본 것과 직접 들은 것도 있었겠지만, 누가는 자신의 귀와 눈에 들려지고 보여지는 증인들의 증언과 기록에 집중하고 있다.

     

    미제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 사건이 있었던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 탐문하는 형사처럼 퍼즐 조각을 맞추며 전체의 그림을 찾아가고 있다.

     

    그들이 전해주는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고, 종합하여 하나의 책으로 기록하고 있다. 의사로서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인간의 몸을 하나의 유기체로 바라보도록 훈련되어져 왔던 그의 제2의 본성이, 이루어진 사실에 관한 수많은 이야기를 하나의 이야기로 통합하는데 적합했을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정밀한 과학의 시대 속에서 현대인들은 즉흥성과 동물적 감각에 의존하고 있다. 수렵과 채집 생활로 생을 연명했던 고대인들과 큰 차이가 없다. 동물적 삶이 아닌 인간적 삶을 살고자 한다면, 믿음이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믿음은 이루어진 사실에 뿌리를 내린 것이어야 한다. 감정은 파도 같고, 생각은 바람처럼 변한다. 그러나 이루어진 사실, 사건은 남는다. 누가는 바로 그 사건의 전체를 종합하여 데오빌로와 데오빌로들에게 들려주고 있다.

     

    예수는 실존했다. 말씀은 역사 속에서 육화되었다. 십자가는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를 잇는 가장 실제적인 다리였고, 죄와 사망을 이긴 부활의 생명이 죽음의 세상 속에 교회를 낳았다. 

     

    2. 정리되지 않은 기억의 파편 속에서는 믿음이 온전하게 자라지 못한다 (3절)

    누가는 말한다.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근원부터', 그는 그 일이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를 살피고자 했다.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막4:17)

    뿌리가 없다면, 줄기는 자라지 못한다.

     

    누가는 조사자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수집가가 아니다. 그는 선택하고, 배열하고, 강조하고, 줄을 세운다. 정리되지 않은 기억덩어리들이 간혹 감동을 전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온전한 믿음으로 자라게 하지 못한다.

     

    믿음은 이루어진 사실, 정돈된 복음에 뿌리를 내리고 온전한 모습으로 자란다. 누가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차례대로 쓴다. 헷갈리지 않게. 놓치지 않게. 온전한 복음이 온전한 믿음으로 자라가도록.

     

    정돈되지 않은 메시지를 듣고 자란 신앙, 그 영적 상태는 어떨까. 데오빌로를 혼란스럽게 한 것은 뒤죽박죽 엉켜 있는 혼란스러운 메시지들 아니었을까. 흔들리지 않는 믿음은 온전한 복음에 뿌리 내림으로 시작된다. 누가는 그 질서를 제공하고자 글을 다시 쓰려 한다. 이것이 누가복음의 기록 목적이다. 

     

    오늘 우리의 신앙의 집은 어떠한가? 감동의 조각들로 엉성하게 지어져 있는 것은 아닌가? 작고 크고 아름답고 화려하고를 떠나서 각각의 재료들이 사용되어져야 할 곳에 정확한 크기로 사용되어져 집의 규모를 이루고 있는가?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여전히 당신이 흔들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지러운 세상 사는데 흔들리는게 당연한 것인가?

     

    아무도 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위하여 세움 받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살전3:3)

     

    3. 목적은 단 하나 – 당신의 확신을 위하여 (4절)

    누가는 이 복음서를 쓰는 이유를 단 하나로 요약한다.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 함이로라.”

     

    ‘당신은 알고 있다. 그런데 확신이 없다.’

    지식(정보)는 우리에게 잠깐의 유익을 준다. 흔들리는 삶을 붙잡아 줄 수는 없다.

     

    누가는 지식을 넘어서 확신을 전하고 싶었다. 이 글은 ‘변론’도 아니고, ‘사상’도 아니다. 오직 한 사람. 한 영혼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얻게 하는, 확신을 주는 복음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히12:28)

     

    우리도 복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 흔들린다. 왜?

    복음과 복음 아닌 것들이 혼재하고 있음이다.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확신이 필요하다. 그래야 고난 앞에서 물러서지 않는다.

    유혹 앞에서 타협하지 않고 회의 앞에서 무너지지 않는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이 바쁜 세상에 강해설교라고요!

    누가복음, 핵심만 간단하게, 딱 잘라서 한 마디로 정리하면 안되나요?

    너투브 보면 20분만에 신약 27권을 완벽 정리하던데, 목사님 설교 길게 하는 건, 한 마디로 실력이 없어서 그런거래요.

    그래서 그 지식으로 세상을 이기고 있는가? 승리하고 있는가? 흔들리지 않는 일체의 비결을 얻었는가?

     

    그것이 아니라면, 여전히 흔들린다면, 겸손한 마음으로 누가가 전하는 복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어보아야 할 것이다.

     

    결론 – 누가는 목소리만 큰 사람이 아니다. 그는 확신의 사람이다.

    누가는 호소하지 않는다. 설득하지도 않는다. 그는 단지 ‘사실’을 말한다.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한다. “나는 무엇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더 깊이 묻자. “내가 아는 것이 나로 확신 안에 거하게 하는가?”

    복음은 지식이 아니다. 이루어진 사실이다.

     

    그것은 과거의 사건이면서 과거에 매여있지 않다.

    2000여 년 전 이루어진 그 사건이 들려지는 지금 나와 당신의 삶에 그 사건이 다시 일어난다. 

     

    데오빌로는 누구인가. 흔들리는 신자다.

    기억은 남아 있지만, 확신은 없는 도시를 헤매는 사람이다.

     

    누가는 그를 위해 붓을 들었고, 성령은 그를 통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아는 것을 지나서 확신으로 나오라.”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떤 사람이 된 것은 너희가 아는 바와 같으니라(살전1:5)

     

    누가복음 강해설교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복음의 말씀이 흔들리는 당신을 확신 가운데로 인도할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루어진 사실, 복음이 선포되는 주일, 말씀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겠다고 결단하라.

    (송병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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