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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창세기 1:3)
성경은 하나님의 선언으로 시작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문장은 설명이 아니라 선포다. 논증이 아니라 계시다. 성경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전제한다. 그리고 그 하나님이 행동하신다고 말한다. 창조하셨다고 말한다.
우리는 언제나 무엇인가를 설명하려 들고, 이해하려 애쓰며, 납득되지 않으면 믿기를 주저한다.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이해를 출발점으로 삼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먼저 밝히고, 그분 앞에 인간을 세운다.
창세기 1장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말하기 전에,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먼저 말한다. 바로 이것이 복음의 질서다.
복음은 언제나 인간의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도권에서 시작된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창조 이전의 땅은 질서가 없고, 방향이 없으며, 생명의 가능성조차 보이지 않았다. 히브리어로 ‘혼돈’은 토후, ‘공허’는 보후다. 이것은 단순한 무질서가 아니라 의미 없음, 목적 상실, 생명 부재의 상태를 가리킨다.
놀랍게도 성경은 인간의 상태를 설명할 때 이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한다. 죄로 인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내면은 바로 이 상태다. 정돈되지 않은 감정, 방향 없는 욕망,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
우리는 종종 스스로를 괜찮다고 여기지만, 하나님 앞에 서면 우리의 실상이 드러난다. 우리는 스스로 빛을 만들 수 없는 존재다. 질서를 창조할 능력이 없다. 공허를 채울 수 있는 생명을 생산하지 못한다.
개혁주의 신학이 말하는 전적 타락이란 인간이 온갖 시도와 갖은 노력을 다하더라도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단코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없다는 선언이다.
혼돈과 공허는 단순히 창조 이전의 상태가 아니라, 죄 아래 있는 인간의 영적 현실이다.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혼돈이 전부가 아니다. 공허가 모든 것을 집어삼킨 것이 아니다.
어둠 위에 하나님의 영이 계신다.
여기서 ‘운행하다’는 말은 어미 새가 알을 품듯이 감싸고, 떠나지 않고, 기다리며 보호하는 움직임을 뜻한다. 아직 빛은 없고, 질서는 시작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이미 떠나지 않으셨다.
이 장면은 복음의 예고편과 같다. 인간은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할 수도 없지만, 하나님은 이미 일하고 계신다. 이것이 은혜다.
은혜는 인간의 요청 이후에 오는 보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개입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기 전에, 하나님은 이미 우리 곁에 계신다.
우리가 회개하기 전에, 성령은 이미 마음을 두드리고 계신다.
우리가 빛을 원하기 전에, 하나님은 이미 빛을 준비하신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나님은 도구를 사용하지 않으신다. 재료를 모으지 않으신다. 설명하지 않으신다.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 말씀은 즉시 현실이 된다.
“빛이 있었고.”
이 짧은 문장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복음의 핵심을 담고 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고, 말씀으로 인간을 새롭게 하신다.
신약은 이 빛을 이렇게 증언한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은 단순한 물리적 현상이 아니다. 성경에서 빛은 하나님의 임재, 생명, 진리, 구원을 의미한다. 어둠은 무지와 죄, 하나님과의 단절이다.
우리는 종종 환경이 바뀌기를 기다린다. 상황이 좋아지면 살아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환경을 고치지 않으신다. 말씀을 선포하신다.
복음은 “네가 바뀌면 내가 사랑하겠다”가 아니다.
“빛이 있으라”는 하나님의 선언이 먼저다.
그리고 그 선언이 인간을 살린다.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하나님의 창조는 구분의 역사다. 섞어두지 않으신다. 구별하신다. 빛과 어둠, 물과 물, 바다와 땅을 나누신다. 이것은 차별이 아니라 질서의 회복이다.
죄의 본질은 섞는 것이다. 선과 악을 섞고, 창조주와 피조물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은 다시 나누는 일이다.
빛은 빛답게, 어둠은 어둠답게.
복음은 우리의 삶에도 구분을 가져온다. 이전에는 죄와 은혜가 섞여 있었고, 자기 의와 하나님의 의가 뒤섞여 있었지만, 말씀 앞에 서면 분명해진다.
“나는 빛이 아니다. 그러나 빛이 오셨다.”
이 고백이 복음의 시작이다.
셋째 날, 하나님은 물을 한 곳으로 모으시고 땅을 드러내신다. 그리고 그 땅에 생명이 자라게 하신다. 풀과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들.
이 모든 생명은 스스로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씨를 맺고, 다음 생명을 준비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이유는 단지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했기 때문이다.
복음 안에서의 삶도 마찬가지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은혜로 끝나지 않는다.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그 열매는 자랑이 아니라 증거다.
이신칭의는 행위를 무시하지 않는다. 다만 행위의 자리를 정확히 둔다.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결과로.
창세기 1장은 단순한 기원이 아니다. 복음의 구조다.
혼돈 → 하나님의 영 → 말씀 → 빛 → 질서 → 생명.
이 순서는 오늘도 동일하다. 우리의 삶이 다시 무너질 때, 하나님은 다시 말씀하신다. “빛이 있으라.”
그 빛은 우리의 선함이 아니다. 결단도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다.
우리는 여전히 연약하고, 자주 혼돈으로 돌아가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는다. 빛은 꺼지지 않는다. 창조하신 하나님은 새 창조를 멈추지 않으신다.
오늘의 묵상은 이렇게 우리를 부른다.
빛을 만들려 애쓰지 말고, 빛 앞에 서라.
질서를 만들려 애쓰기보다, 말씀에 순종하라.
구원을 증명하려 하지 말고, 은혜를 신뢰하라.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오늘도 그 말씀은 살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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