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Ⅰ. 굽이치는 오론테스의 아침
새벽 안개가 오론테스 강 위를 기웃거리다 사라질 때, 무너진 담벼락 사이로 비둘기 떼가 날아올랐다. 두 해 전 지진이 휩쓴 자리엔 아직도 잔해가 남았지만, 물빛은 여전히 은빛이다. 강둑을 따라 걷는 동안 들려오는 소음은 포클레인 대신 망치 소리였다. 도시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이들의 투박한 리듬—그 안에 초대교회가 숨 쉬던 옛 심장이 박동한다. 2023년 대지진으로 안타키아(옛 안디옥)는 건물의 80 %가 무너졌다. 그러나 2025년 봄, 영국 설계사 Foster + Partners가 주도하는 재건 마스터플랜이 발표되며 “사라지지 않을 도시”라는 꿈이 구체화되고 있다.
Ⅱ. 성 베드로 동굴교회—암벽 속 숨은 숨결
도심 북쪽 절벽에 움푹 패인 작은 굴이 있다. 전설에 따르면 베드로가 이곳에서 복음을 선포했고, 바울·바나바가 교회 지도자들과 기도하며 선교 전략을 논의했다 한다. 어둠과 습기, 촛농 냄새가 배어 있는 이 동굴교회는 11세기 파사드가 덧대어졌지만 몸체만큼은 1세기의 속살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지금도 매년 6월 29일, 사도들의 축일이면 동서신부·수도자가 함께 미사를 봉헌한다.
동굴 입구에 선 나는 횃불 그림자가 벽을 스치는 환영을 본다. 뜨거운 돌바닥 위에 무릎을 꿇자, 이 땅이 아직 식지 않은 화덕 같다는 생각이 든다—복음의 불씨가 처음 피어난 화덕.
Ⅲ.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
사도행전 11장 26절은 이곳을 가리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 받았다”고 기록한다. 학자들은 ‘크리스티아노스’가 조롱 섞인 외부인의 딱지였다고 추정하지만, 오히려 제자들은 그 낯선 호칭을 기쁘게 받아들였으리라. 바울이 기근 구제를 위해 예루살렘에 헌금을 보낼 때도, 안디옥 교회가 물질로 뒷받침했다. ‘이름’과 ‘나눔’—복음의 두 바퀴가 이 도시에서 처음 맞물린 셈이다.
도시 외곽의 로마 도로를 걷다가 문득, 지금 당신과 내가 메고 다니는 ‘Christian’이라는 명찰도 누군가의 농담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이 마음을 쿡 찌른다. 낙인이 복음의 훈장이 된 곳, 그게 안디옥이다.
Ⅳ. 폐허와 재건 사이, 순례자의 발걸음
안디옥 대성당, 그리스 정교회 성당, 유대 회당… 대지진은 신앙의 피부 같은 건축물을 처참히 벗겨냈다. 하지만 유리 파편 위에도 새싹은 자란다. 2024년 2월, 폐허가 된 그리스 정교회 본당 터에서 마을 노인들이 “키리에 엘레이손”을 합창하며 부활 미사를 올렸다는 보도가 전해졌다. 무너진 돔 아래 울려 퍼진 평화의 음계는, 사람이 먼저 사라져도 신앙은 남는다는 역설을 들려준다.
재건 현장을 지나는 순간, 나는 자신도 모르게 건축자재 먼지를 손바닥에 묻혔다. 그 따듯한 먼지에서 느껴진 건 카르타르시스였다—초대교회 성도들이 ‘먼지 쌓인 도시’를 선택했듯, 오늘 나는 이 먼지투성이 도시에 순례자의 손도장을 찍었다.
Ⅴ. 도시의 숨은 길—티투스 터널과 모자이크
● 티투스 터널: 로마 12군단이 1세기에 뚫은 수로 터널. 절벽을 가로지르는 1.3 ㎞의 암반 통로 안에 서면, ‘좁은 길’의 은유가 시공을 넘어 다가온다.
● 아로네트 산책로: 강을 따라 조성된 데크로드. 저녁 노을이 강물과 복구 중인 건물 벽을 동시에 물들이면, 환멸 대신 희망의 채도가 더 짙어진다.
● 하타이 고고학 박물관: 세계 최대 규모 모자이크 컬렉션을 보유했으나 일부 전시관이 폐쇄 중이다. 임시 개방 구역에 들어가면 로마 시대 갈라테아 신화가 담긴 모자이크가 여전히 빛난다. 거대한 파편 속에서도 창조미학은 살아 남았다.
Ⅵ. 순례 팁—2025년 현장 노트
항목 내용
입국 & 이동 | 이스탄불 → 하타이공항 직항(1시간 45분). 공항에서 안타키아 구시가지는 임시 셔틀버스(1일 6회) 운행. |
숙소 | 시내 호텔 상당수가 복구 공사 중. 대신 사미안 수도원 게스트하우스(셀릭 거주 수녀회, 1박 35 € 조식 포함)가 순례객을 우선 배정. |
안전 | 구역별로 붕괴 위험이 남아 있어 헬멧·안전화 대여소가 설치됨. 현지 가이드 동행 필수. |
예배 | 매주 토요일 17:00, 동굴교회 영어 미사. 복구 기금 헌금(권장 10 €). |
음식 | 안티오크풍 마눌(타히니 소스 머슬)·쿰루(참깨빵 샌드위치). 길거리 포장마차 재개장률 60 %. |
Ⅶ. 아네모네의 속삭임—개인적 묵상
지진 잔해 사이로 피어난 봄 아네모네를 바라보며, 나는 바울을 떠올렸다. 그가 안디옥을 “선교 기지”라 부르지 않고 “집”이라 불렀다는 사실을. 지중해 연안 도시들 가운데, 그는 왜 맨 처음 이곳에서 출발했을까? 정치·문화·인종이 엉겨 붙은 ‘혼종성’이야말로 복음의 실험실이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안디옥도 여전히 복잡하다. 철거 소음, 언어가 다른 이주 노동자, 신앙을 달리하는 이웃이 하룻밤 사이 골목을 바꿔 놓는다. 하지만 그 낯섦 속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이 실험된다. 내가 십자가 모양 목걸이를 손끝으로 굴리며 다시 다짐하는 이유다—무너진 돌 사이를 잇는 건 결국 사랑뿐이라는 것을.
Ⅷ. 작별 그리고 초대
해 질 녘, 동굴교회 앞 계단에 앉아 오렌지빛 하늘을 바라본다. 어느새 공사장의 크레인이 십자가 실루엣을 그린다. 낮에는 잿빛 상처였던 도시가 황혼 속에서 금빛 성전으로 변모하는 순간, 나는 부활 서사와 재건 드라마가 똑같은 주제로 귀결됨을 깨닫는다: 새로운 시작.
안디옥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그래서 더 매력적이다. 미래의 순례자여, 당신의 발자국이 이 도시의 새 지도에 한 줄을 그릴 것이다. 무너진 돌더미가 기초가 되고, 눈물과 먼지가 시멘트가 되어, 초대교회의 숨결이 다시 건축된다. 그 현장에 동참하고 싶다면—지금, 이 글을 덮고 가방부터 꾸려라. 우리는 모두 다시 태어나는 도시의 동역자이자,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이 남긴 빈 의자에 앉을 손님이니까.